“하나뿐인 목숨 너무 아꼈기에… 주님께 바친 주기철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입력 2019.04.22 06:00
맏형 목회 활동하던 교회에서 ‘소년 목사’ 칭호
▲어린 주광조를 안고 있는 주기철 목사의 모습. ⓒ홍성사 제공

주기철 목사님의 기도와 말씀과 섬김과 순교의 영성을 염원하며’라는 주제로 김명혁 목사(한복협 명예회장, 강변교회 원로)와 이응삼 목사(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 전 사무총장)가 18일 오전 서울 강변교회에서 대담을 진행했다.

김명혁 목사는 매달 한 차례씩 교계 주요 원로들과 신앙의 선배들을 주제로 대담을 열고 있다. 대담은 두 사람의 발표와 이후 토론 순으로 진행되고 있다.

맏형 목회 활동하던 교회에서 ‘소년 목사’ 칭호

김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주기철 목사는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 복부리에서 주현성씨의 4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일제가 웅천에 침략해올 것을 우려한 일가의 어른 주기효 씨는 1906년 개통학교를 세웠고, 소년 주기철은 이 학교에서 투철한 민족정신과 민족애를 키웠다.

그 즈음 맏형 주기원은 이곳에 웅천교회를 세워 목회활동을 시작했고, 소년 기철은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소년 목사’ 칭호를 듣기도 했다. 개통학교 7년을 마칠 무렵, 그는 부산에서 우연히 춘원 이광수의 애국 강연을 듣고 감동을 받아 오산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919년 만세운동이 한창일 때 김익두 목사의 마산교회 부흥회에 참석해 “성신을 받으라”는 외침에 큰 감동을 받고, 1921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해 1925년 졸업했다. 평양 신학교 19회 졸업생으로 30세에 목사 안수를 받고, 1926-1931년 초량교회에서 사역하며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그 기간 진주 성경학교와 경남 성경학원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이후 1931년 7월 마산 문창교회로 옮겨 6년간 목회하며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사경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가는 곳마다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났다. 평양 산정현교회는 길선주 목사를 이을 지도자로 주기철 목사를 청빙했고, 1936년 7월 하순 부임해 1937년 교회당을 신축하고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주기철 목사는 이후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한국교회를 지키고자 했다. 그는 이를 선봉에 서서 반대하다 1938년 2월 8일 경찰에 1차 검속돼 27일만에 석방됐고, 1938년 8월 제27회 장로회 총회를 전후하여 2차 검속돼 6개월간 대구 경찰서에 수감됐다 1939년 2월 석방됐다.

또 1939년 8월 3차 검속됐다 9개월 후인 1940년 4월 20일 석방됐고, 1940년 9월 다시 4차 검속돼 평양 경찰서와 형무소에서 4년간 옥중 생활을 하다, 1944년 4월 21일 밤 9시 30분경 49세를 일기로 순교의 제물로 주님 품에 안겼다.

댓글 0 본인 삭제 0 댓글운영정책
0/300등록